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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거나 잘 먹어대는 지렁이들은 수와 덩치를 마구 불렸고, 다른 통에다가 몇 마리 옮겨놓자 그 


친구들도 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에 말씀 드렸듯이 물이 점점 고이는 문제가 있고, 


음식물들이 점점 쌓여서 냄새가 나는 문제가 추가로 생겼습니다. 냄새가 약간 나도 괜찮을 것 같은 


옥상으로 옮겨놨었는데... 그게 문제였습니다...ㅜ 지렁이들이 모두 죽어버렸습니다ㅜ 38도에 달하는 한여름 폭염에 


본의 아니게 흙과 같이 구워버린 것이죠.ㅜㅜ


 

 처음에는 방에다가 놨다가 냄새가 많이 나서 문 옆에 그늘에다가 놨는데, 그 때도 괜찮았었는데...


 한 여름의 옥상은 더워도 너무 더웠나봅니다. 낮기온이 38도씩 되던 미친 날씨긴 했어요..ㅜ


 그 엄청난 날씨에 그늘에 있던 지렁이들도 다 죽어버렸습니다ㅜ 


 그늘이고 뭐고 그런 날씨에는 지렁이가 못 버티는 거였죠. ㅜ 몰랐습니다. 


 그러나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땅도 비옥하게 하는 지렁이... 조금 더 실험해 보려합니다.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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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난 악필인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담임선생님에게도 이미지가 안 좋거나 혼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반면 글씨를 잘 쓰는 학생은 예쁨 받았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시절 저의 글씨를 교정해보고자 엄마는 잔소리를 많이 하셨었는데, 아무런 개선이 없었죠. ㅎㅎ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서예학원에 가서 상담을 하셨습니다. 붓글씨와 함께 손글씨도 같이 해주실 수 


있느냐고. 뭐 수강료 준다는데, 마다하진 않으셨죠.


 오래 다니지는 않았지만 붓글씨는 워낙 섬세하고 어려운걸 감안해도 어느 정도 늘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손글씨는 전혀 늘지 않았습니다. 아니, 자세히 말하면 학원용 글씨체(예쁘기는 하나


속도가 너무 느리고 힘들어서 오래 쓰지 못 하는)가 새로 생기고, 예전 엉망인 글씨체는 그대로 유지가 


됐었습니다.



 내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부모님의 바람으로, 억지로 끌고가는 학원 선생님의 지도로


예쁜 글씨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적당히 학원에 간 그 시간을 때우려 하는 것이 어린 


아이의 마음이었겠죠.


 일단 원해야 했고, 학원에서 연습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연습도 계속 했어야 


했겠지만 그건 어느 정도라도 즐기는 마음이 없으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공부건 운동이건 예술이건 본인의 의지가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악필 교정을 좀 해둘걸 하는 후회가 되긴 합니다. 어릴 때는 잘 쓰려고 하면 


잘 쓰는 글씨가 나왔지만 다 자란 지금은 그게 안 되거든요.


 그래도 손글씨를 쓸 일이 점점 줄어서 참 좋습니다... ㅎㅎ 이렇게 블로그도 타자로 치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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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 옥상에는 아주아주 작은 텃밭이 있습니다. 


너무 작아서 잎채소와 방울토마토, 고추를 심어요. 잘 자라는 편이고, 활용도도 높다는 그런 이유 때문이죠.


 그런데 아무래도 거름에 소홀하다보니 어느 정도 크다가 못 크는게 있습니다. 전문 농사꾼처럼 


비료, 거름을 할리가 없으니까요 ㅎㅎ...


 그래서 지렁이를 구매해서 풀어놓기로 생각했었습니다. 지렁이가 토양에 좋은건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상식으로 많이들 알고 계실겁니다.), 음식물 쓰레기도 처리가 된다고도 들은 적 있어서 토양에 좋고, 


음식물 쓰레기 줄여주고 1석 2조 아니겠습니까? ㅎ


 일단 실험 삼아서 스티로폼 박스 안에 흙, 지렁이를 넣고, 염분기 없는 음식물 쓰레기를 넣어두니, 


음식물 쓰레기도 줄어들고 지렁이들도 쑥쑥 크더군요. 



 그런데 솔직히 음식물 쓰레기 줄어드는건 티가 크게 안 나요; 왜냐하면 집에서 생기는 쓰레기의 양이 


더 많았거든요;ㅎ 그래도 지렁이가 막 자라는거 보면 뭘 먹고 자라겠습니까. 음식물을 먹겠지.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아래로 물이 자꾸 고인다는 거였습니다. 음식물과 지렁이에서 생기는 수분이


아래로 고이는 거였겠죠. 찾아보니 그 현상 때문에 구멍을 뚫어서 물이 빠지게 하더라고요. 아무런 


지식 없이 시작한거라 생기는 문제였습니다.; 


 그래도 지렁이가 주체가 안될 정도로 많아지고 커져서 나름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수 있겠네요 ㅎ 


그런데 그 이후 지렁이들을 깡그리 죽이는 결과가 생겼었습니다ㅜ  


 그건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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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저희 집은 한달에 한번씩 꼭 삽겹살을 먹었습니다. 꼭 아버지 월급날이었어요. ㅎ 


월급날이 아닌 때에도 먹기도 했고요;ㅋㅋ 


당시 삼겹살 시세를 잘 모르겠지만, 고기를 사서 집에서 먹는 것은 부담되는 비용이 아닌 것 같았어요. 한달에 한번은


 기본이고, 놀러가면 먹고, 아줌마들끼리 모여서 먹고 친척들 모이면 또 고기 먹고... 그런 기억도 있긴 하거든요. 


 어린 나이였음에도 고기맛을 아는 것은 물론 먹는 양도 상당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전학 오면서 마장동 축산 시장이 상당히 가까워서 여전히 돼지고기. 특히 삽겹살 사랑은 


계속 됐습니다. 강원도에서보다 당연히 싸게 사올수가 있었으니...ㅋㅋ


 그런데 아버지의 청춘도 점점 저물어가고 배가 나오시고, 저 역시 경도비만에서에서 중도로 바뀌는 심각함을 


인지하던 중 삼겹살의 가격은 오르고,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들이 많이 돌면서 거의 안 먹고 살게 됐습니다. 외식 


가게가 삽겹살집인 경우는 아주 가끔 있어도 집에서는 안 먹은지 굉장히 오래됐죠.


 끊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가끔 생각은 나지만, 다른 부위로 제육 볶음으로 먹기도 하고, 앞다리나 목살 같이 구이가 가능한 다른 부위로 


대체해서 먹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한달에 한번 꼭꼭 푸지게 챙겨 먹던 것은 전혀 안 해요. 그렇게 하면 솔직히 너무 


많이 먹어서 돈도 많이 나가고요. ㅎ 당연히 건강에도 안 좋고요..


 쓰다보니 삽겹살 땡기긴 하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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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결혼식처럼 제사 역시 바꿔야 한다고 생각 하는 사람 중 하나 입니다. 


 요즘은 언론 매체에서도 그 점에 대해 많이들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과거의(생각보다 얼마


안된) 제사 문화에 대해 문제 인식을 하고 있기는 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래는 지금까지보다 희망적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제가 느끼는 제사문화에 대해 적어보고자 합니다.



 * 스케일 자체가 큰 이유 : 결혼문화, 장례식 문화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하객의 숫자와 예식장의 규모, 하객의 숫자, 


화환의 숫자처럼 제사상이 다양하고 화려한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 출발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거기서 출발해서 대책 없이 커지다보니 딱 맛 있게 먹는 양만큼 뿐만 아니라 한꾸러미씩 싸줘도 남는 음식을 처리하는 


정도의 규모가 되고, 큰 문제는 그걸 만드느라 물적, 심적 자원이 엄청나게 낭비가 된다는거죠.




* 예전에는 그게 왜 가능했을까? 뭐가 문제일까?



 1. 농경문화 측면 : 60~70년대에는 농사 짓는 집안이 더 많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에 제사문화가 그 때에 자리 


잡혔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장남은 농촌에,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남는 경우가 많았고요. 


그래서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농촌, 어촌이 떠오르게 됩니다. 


농경문화에서는 인력 자체가 많았고, 그만큼 큰 일(제사)를 벌이는 일에 노동력을 쏟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심적인 것은 뒤로해도 일단 가족 내에서 인력 자체가 풍부했던 거죠. 그때에 걸맞게 만들어진 문화라 인력 자체가 


줄어든 현대인들이 그 문화를 그대로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어느 정도는 간소화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간단하게 할수 


있는 규모는 아니라서 이걸로 갈등이 생기고 조리된 음식을 사서 하기도 합니다.


 2. 여성의 사회적 인식적 변화 : 요즘은 맞벌이 부부가 많죠. 명절이나 제사 때가 아니어도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제사까지 챙겨야 하는 거죠...ㅜ 


농경사회처럼 총력전이 가능했던 때가 아닌 상황에서 그 때의 문화를 그대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여성인력이나 인권에 아무 관심이 없던 때와는 다릅니다. 당시에는 여성들이 힘든 것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구박 


받고, 쥐어짜고 심지어 폭행하거나 내쫓고 그런 일들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전혀 보호 받지 못 했던 시기였죠. 제사가 


힘들다고 한들 불만을 표하고 거부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3. 핵가족화. : 80, 90년대에 핵가족화라는 말이 참 많이도 나왔습니다. 당시에 배울 때 조금은 부정적인 느낌으로 


보이기도 했었는데.. 하여튼 핵가족화로 명절, 제사가 있을 때 한 집으로 모여야 하는데, 이 과정이 힘들 수도 있고, 


갈등의 씨가 되기도 합니다. 


예전 농경사회 때는 이런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각각의 가구들이 한 동네에 모여사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고, 가족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갈등상황 자체가 지금과는 인식이 다릅니다. 


 핵가족화가 되어도 한참 된 지금 시기에 제사는 대가족 때 스타일이라 더욱 힘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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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잘못을 저지르기 전 노홍철 씨를 참 좋아했었습니다. 다른 많은 시청자들도 비슷하겠지 싶어요. 진짜로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예능인 노홍철을 재미있게 보는 사람들이 꽤 있겠지 싶습니다. 




특히 저의 경우에는 저는 주로 재미있고, 웃긴 사람들을 좋아하는데, 차분하고 정돈된 사람들보다 뭔가 정신 없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제 내면에 그런 면이 있는데, 표현을 전혀 못 하고 살다시피 하다보니, 그런 분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여튼 노홍철 씨는 그런 위에 언급한 그런 사람에 딱 부합하는 연예인이었죠. 과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런 면 때문에


더더욱 좋아했었어요. 그래서 사실 그가 없는 무한도전은 생각하지 못 했었습니다...


 

 그런데 좋아했던 노홍철씨를 처음 TV에서 봤을 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엠넷이었나 하여튼 케이블 방송이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인터뷰를 하는 그런 모습이었어요.(그 때 가는거야~ 를 


했었죠.) 


 비주얼적으로는 무도 초창기 수염과 마른 모습이 딱 그 때 모습과 비슷했고요.. 


 그런데 인터뷰가 인터뷰가 아닌 것 같고...막 부다다다다다!!! 하고 말을 쏟아내는데,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말 중간에 숨을 빠르게 들어마시는 소리로 엄청 크고... 말을 쏟아내고 싶은 의지가 발음, 정돈된 


음성 등을 다 쫓아내고 쏟아내는 느낌...ㅜ 


 무한도전 노홍철의 캐릭터를 같이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예능이 아니라 그냥 원맨쇼 개념이었어서. 


막 열심히 하고 싶고, 튀고 싶은 노홍철의 마인드가 화면으로 다 보이더군요. ㅎ 


 당시에 같이 보던 친구가 '쟤 되게 웃겨~' 라고 하는데 솔직히 뭐라고 하는지를 몰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딱 하나 알아듣는건 좋아~! 가는 거야~! 그거였어요. ㅋㅋ


 그 포즈가 무도에까지 가서 그대로 무한~! 도전~! 으로 이어진거죠? 아마도 맞을 겁니다. ㅎ



 무턱대로 부다다다다!하고 떠들던 때보다 정돈됐지만, 누가봐도 보통 사람이 아닌 모습이 


무한도전에서 참 재미있게 보였던 것 같아요. ㅎ 어디로 튈지 모르고 지능적인 면모도 있고..


 아무래도 잘못한 것도 있고, 나이도 있고 해서 예전 같은 모습은 기대하기 힘들겠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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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공식적인 봉사활동 시간이 꽤 많습니다. 100시간은 훌쩍 넘는 것 같아요. 비공식적인(기록이 없거나 복지관 자체 


기록에만 존재하는) 시간은 더 많겠죠. 


 21살 쯤 한참 많이 했다가 군대 가기 몇일 전에도 했던 것으로 기억 납니다. 


 봉사활동이 어느 정도 저에게 힐링을 주긴 했었던 것 같아요.


 그 봉사활동을 처음 시작한 계기는 책 한권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에 기본적으로 대인관계, 진로 등 여러가지로 힘들어져 있는 상태에서 밖에 거의 나가지 않고, 게임, 


인터넷으로 시간을 보냈어요. 조그마한 경품이라도 받아아볼까하는 생각으로 경품응모를 


했었는데, 거기에서 당첨된 책 때문이었어요. 


 지금은 많이 유명한 세이브더칠드런 창립자가 쓴 책이었는데, 단체 설립하기까지의 일화들과 봉사, 선행을 권하는 


내용들이 가볍게 쓰여져 있었죠.


 당시에 그 책을 읽고 나름 느낀 것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찾아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었습니다.


 대인기피와 자신감 하락 때문에 처음부터 사람들을 만나는 활동을 하지는 못 했고, 몸으로 하는 


봉사부터 시작해서 하다보니 결국 사람을 케어하는 봉사까지 할수 있었습니다.

 

 봉사동아리도 가입 했었는데, 오래 활동하지는 못 하고 결국 혼자서 참 열심히도 봉사활동을 다녔죠.


 아마도 마지막 봉사가 군대에 있을 때 인것 같은데, 벌써 7~8년이 됐네요.


 생각해보면 오래도 안 했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열심히 했었네요.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뭔가 여유가 없고, 쫓기는 것 같은 지금 상태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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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버스터미널, 휴게소, 기차역, 기차 등등 교통편에 관련된 곳에서는 오징어를 참 많이 


 팔았었습니다. 그래서 '심심풀이 오징어'라는 단어도 있었죠.;; 저렴한데 맛도 괜찮고 한참동안 질겅질겅


씹을 수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오징어와 땅콩의 조합도 오래 전부터 있었죠 ㅎ)

 

 (심심풀이 땅콩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것 같긴 하지만...)


 조미 오징어 형태나 백진미채 같은 형태도 먹었지만, 그냥 완전히 마른 오징어 형태를 많이 


먹었습니다.; 반건조 아니고요. 그냥 아주 말라서 갈색인 완전 마른 오징어로 말이죠. 


 워낙 단단해서 그 형태로는 요즘엔 잘 안 먹고 좋아하는 사람만 구해서 먹을텐데 말이죠.ㅎ 


 매점에서 연탄 난로(그 땐 난방을 거기다 했었어요)에다가 구워서 종이 봉지에 넣어서 팔고 그랬어요. 


파는 곳이 있는 수준이 아니고, 매점이라는 매점에서 죄다 팔았다고 보면 맞을 것 같아요. 


그 전에는 눈깔(사실은 입)만 팔기도 했다는데 그 시대는 잘 모르겠고요.


 매점 자체가 마른 오징어 전문 느낌인 곳들도 있었고...그런 곳은 딱 봐도 오징어가 엄청 많았었어요.


 버스 탈 때면 꼭 오징어 사서 쭉쭉 찢어서 먹으면 어른 나이에도 입에 잘 맞았어서 잘도 먹었었는데...


 지금은 보기 힘든 광경이네요. 


 대신 휴게소에서는 반건조 오징어를 맥반석에 구워서 팔긴 하던데, 좀 비싼 것 같아서 


 한번도 안 사먹었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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